Wednesday, June 30, 2010

CAD, Cimatron

◀첫 작품     기회가 되어 CAD(Computer Aided Design)라는 Software를 다 배우고 나서Cimatron 이라는 3D(입체영상)를 만들어 내고 그형상을 그대로 각 좌표값을 생산기계에 입력하면 주어진 재료를 깍아내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배우는중에 컴퓨터 책상옆에 있는 스피커 형상을 보면서 도움없이 만들어본 작품이다.

컴퓨터로 뭔가 새로운걸 만들어 낸다는것이 아마 286 XT-AT 가 공존하던시절 내가 하는 업무를 데이타베이스로 (D-base) 구현한게 처음이였다.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신입사원시절 퇴근이 매일 늦었다. 그땐 2D CAD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이였는데 .무언가 새로운걸 만들어 낸다거 ....그 재미에 한때 컴퓨터 계통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이러이러한 일을 해보고 싶다 했더니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그길로 가지 못했다.

그 이후 윈도우 3.1이 나오고 한동안 마우스 클릭을 제대로 못했는데 뒤돌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서 다시 컴퓨터에 열중해 다른 프로그램들을 익히기 시작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새롭게 배운다는거 또한 뭔가 만들어 낸다는건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오래전 Homepage  습작 Design--------▶

Friday, June 18, 2010

법정 가는길...

    살아 가면서 문제가 있어도 법정까지 가는 일은 되도록 없으면 하는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바램이다. 특히, 금전관계로 인하여 지금까지 알고 지내온 상대와 법정까지 간다면 돈과 사람 둘다를 잃게 마련이지만,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은 감정의 선을 넘는 행위이다.

처음으로 법의 힘을 빌려야 했던건 사업을 시작해서이다. 금전적인 관계로 부득이하게 상대에게 일단은 경고차원에서 내용증명을 보내는 일이 출발이였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 입장은 대서소에 가서 쓰는거였는데 내용을 내가 다 말하면 받아 적기만 하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거금 일십만원(壹拾萬圓) 주었다. 내용증명을 들고 오면서 화가 났다. 내용은 내가 다 말하고 단지 받아 적기만 해서 나한테 넘겨준건데...

시작했다. 내가 직접하기로, 내용증명을 기본으로 소장(訴狀)에서 증인출석요구서 까지, 프랜차이즈 사업을 한 관계로 계약서는 타회사것을 기본적으로 작성한거라 나름 탄탄했는데 점주들이 예상하는 바와 달리 사업이 부진하면 트집을 잡고 여러가지 계약불이행이나 소송을 걸어 와서 원고, 때론 피고가 되었다.

첫 법정에 서는날 그저 내 억울함을 피력하고 싶어서 긴장된 마음에 내말을 많이했다. 하지만 판사의 대답은 묻는말에 "예, 아니오" 만을 요구하였다. 상대도 억울한것이였으니 판사의 입장에선 중립위치에서 소장(訴狀) 내용과 증거만으로 판결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억울함은 필요하지 않았다는걸 나중에 깨달았다.  단 한번으로 판결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지라 한번, 두번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잘하던 못하던 여유가 생겼다. 판사가 묻는 말에도 단순한 답변만을 읊조리게 되었고...

그러던중 대기업(삼양사:설탕등을 만드는 회사)과 내가 물품대금으로 받아야할 100% 순수한 금액인 700만원짜리 송사(訟事)을 하게 되었는데 법인과 개인회사 두개를 가지고 있었던 당시에 법인은 친구의 명의로 대표이사를 해 놓아서 내가 원고를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변호사를 구해야만 했다. 헌데 그 작은 소송금액에 변론을 맡아 줄 사람이 없었는데 운좋게도 외국에서 국제변호사 자격증을 딴 사람이 이제 막 오픈한 변호사가 있어 맡아 주었다. 비용은 250만원...쩝..다 이겨야..700백만원인데...그래도 맡아 주는것 만으로도 감사했다. 변호사가 쓴 소장은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문가이니 당연하였으리라.소송이 진행되자 상대측에서 합의를 보자는 것이였다.400만원에... 이게 무슨 강아지 Grass 뜯어 먹는소리인가 싶어 난 다 받기전에는 합의는 없다고 했다.

" 사람이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쪽 뺨을 내밀겠냐?." 어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이 나에게 해준 말이다. 내가 아무리 잘못이 없고 승산이 있는 소송이라도 상대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뜻이였다. 잊어버리지 않고 머리에 새겨져 있다. 이 사무장하는 말이 정신적 피해까지 합쳐 2천여 만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소송가액의 몇 %를 변호사를 지불하고 또 소송에서 이기면 성공보수금을 주어야 한단다. 그때 생각나는건 변호사 이거 믿을꺼 못되는구나 였다. 돈이 아니면 안움직인다는...

결국은 오랜 시간과 더 많은 돈을 투자해야 했기에 감정보다는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400만원 합의하고 끝을 냈다. 영수증 처리 안되는 변호사 비용 250만원을 제외하고는...

이런 일들 이후로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 버린게 있다면 무조건 서류로 남긴다는 것이다.


 ※ 사법제도를 대표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현재 눈을 가리고 저울과 칼을 들고 있다.과거 디케는 칼만을 들고 있었으며 거기에 저울이 더해지고 마지막으로 눈이 가려졌다고 하며 저울같이 공평하고 칼같이 판단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Saturday, June 12, 2010

최근에 본 영화중..

The Capitalism 과 Nothing But The Truth가 있다..

캐피탈리즘은 《화씨 9/11》(Fahrenheit 9/11) 2004 ,《식코》(Sicko) 2007 , 등을 만든 마이클 무어 작품이다. 2007~8 년 서브프라임 문제를  해결 과정에 기득권층과 서민의 대응 방식은 정말로 왜 이 영화를 봐야 하는지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며, 특히 인상적인것은 폴슨 전 미 재무장관의 단 세장짜리 보고서로 7000억불 의회의 승인을 요구하는데 이유불문하고 승인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처음엔 하원의 반대로 무산 되었어지만 곧 그들도 공포의 주입과 타협으로 승인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의 돈으로.... 역시 인간의 정신적 역사는 발전이 없다.

Nothing But The Truth은 굳이 번역하자면 " 오직 진실만이..." 정도. 이 영화 또한  시사성이 강하다. 시놉시스 (Synopsis)를 보면 미국 신문사의 한 기자가 자국 대통령의 불합리한 대외정책에 특종을 잡아 기사로 내보는데 그 기사가 미국가안보법에 위반 되는 것이여서 정보제공자를 정부측에 제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자의 양심상 정보 제공자( Source)에 대한 비밀유지를 위해 침묵으로 일관하여 결국은 1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는데, 촛점은 국가안보법이란 미명아래 권력자에게 무소 불휘의 힘과 대항할 수 없는 개인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 아마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대보다 더 나은  민주적인 사회, 문명화된 사화에 살고 있다고 느낄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걸 깨트린다.


* 마이클 프랜시스 무어(Michael Francis Moore, 1954년 4월 23일 - )는 미국의 영화 감독이자 작가이다. 세계화, 다국적기업, 총기 소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 사회 개혁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2003년 3월 20일, 칸 영화제 시상식에서 발언한 조지 W. 부시 정권에 대한 독설로도 유명하다.

 * Jingoism - 징고이즘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공격적 대외정책의 형태를 띠는 극단적 애국주의” ‘호전적 국수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 늦은밤 막걸리와 함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5287.html

Sunday, June 06, 2010

Arbeit

현대인은 시간제 노예라는 글귀가 생각이 난다..
조금은 비약같지만 집에 데리고 있는 노예보다는 관리가 그만큼 편리하다는 말같다.

내가 처음으로 나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았던게 아마 매우 어렸을때 같은데 정확한 나이는 생각나지 않지만 남의집(친구집인듯....) 고구마를 캐주고 일당으로 고구마를 받았던거 같다. 더 이전 기억은 양식굴을 생산하기 위하여 굴(石花)껍질에 구멍을 뚫어 줄로 매다는 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도운것이 생각나지만 임금을 위한 노동력 제공은 아니였다.

정식적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게 대학 입학후(?)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하였으며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려 시간순서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다만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나는차례순이다.

먼저, 친척이 운영하는 책을 제본 하는 작은 소규모 회사에서 일을 했다. 아주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이였다. 그곳에서 각종 기계가 내는  크나큰 소음과 인쇄된 용지를 자르는 기계칼이 작업자의 손가락 4개를 순식간에 잘라 버린것, 그리고 돈 이외에 제본되는 책과 그전에 제본을한 책도 얻었던거 같다. 그땐 쌓이는 책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은 폐 냉장고를 부수는 일이였다. 그때 아마 처음으로 냉장고를 보상판매 하는 시작했던 걸로 생각이 되는데 그래서 인지 예상치 않게 많은 냉장고가 폐품으로 나왔으며 핵심부품인  콤프레셔(Compressor)와 내부에 있는 A급 플라스틱(Plastics) 이 두개를 주로 재활용하기 위해서 분리하는 것이였다.  작업이 냉장고 케이스에 나사(Bolt & Nut)로 조여져 있는 컴퓨레셔를 하나하나 해체하는게 아니라 도끼로, 플라스틱 또한 공사현장에서 못을 빼는 크나큰 연장(단어가 생각이 안남...빠루?...)을 사용했다. 난 젊다는 이유하나 만으로도 당연히 도끼질을 했다. 대략 하루에 1만 2000번의 도끼질을 해야만 하루가 갔다. 첫날은 도끼를 쥐었던 손이 잡은 모양 그대로 유지하여 펴지질 않았다. 머리를 감을때도 도끼를 잡은 손모양 그대로 감았다. 정말로 다음날은 하지 못할꺼 같았고 흔히 말하는 노가다(No Shoulder)를 어찌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젊은지라 다음날 나가서 일을 하였고 비오는 날을 빼고 달포를 일했던거 같다. 육체노동도 적응하기 나름이였다. 그렇게 번돈은 내자신을 위해서 한푼도 쓰질 않고 동생 등록금 일부와 나머진 어머니께서 사용하신거 같다.

세번째는 알루미늄샷시와 유리를 아파트에 시공,보수 하는 일이였다. 지금은 너무나 커져버렸지만 송파구 문정동이였다. 그땐 이제 막 그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시기였고 건설사에서  일괄 시공을 하지 않았던 부분이 많았던 것이였다. 그래서인지 일이 참 많았고 형님 고향 친구분이였던 실제 사장님이 성격도 좋고 기술이 좋았다. 난 도우미였다 (데모도...일본식 용어가 태반이라...) 그곳에 배운게 많았다. 하루는 체육대 교수라는 집에 가서 일을 하는데 그집 안주인이 미모를 갖추었는데 정말로 일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것이였다. 작업자들 모두가 고마워서 반나절이면 끝날일을 하루종일 해서 깔끔한 마무리를 해 주었다.같은 비용으로 두배의 효과가 났던 것이다. 또한번은 젊은 신혼부부집에서 일을 했는데 작업자가 갈때까지도 일어 나지 않고 준비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작업은 시작되었고 점심도 간단히 시켜 주면서 반무관심으로 일관하여서 작업이 실제 작업시간보다 반도 안걸렸다. 또 한번은 잠실의 장미 아파트로 기억이 나는데 10층 이상으로 작업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작업자에게서 약간의 발냄새가 났었다. 그러면서 발 딛는 곳마다 신문지를 깔아 놓았다. 지금이야 작업하는 사람들이 모두 준비해서 그런일도 없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심리적으로 작업하는데 위축을 가져와서 일이 대충 끝났고 마무리 하면서 내가 한마디 던진게 "고위층 사셔서 하나님이 가까이 있어서 좋겠네요" 하면서 쓴 웃음을 지은적이 있다. 같은 돈으로 다른 효과를 내는 재미있는 현상이다.

네번째는 홍대앞에 있는 서교호텔 디스코 나이트클럽 이였다. 그곳에서 저녁12시까지는 입구에서 "어서오십시오" 라는 말과 함께 클럽으로 안내를 하는 가이드를 했고 그 이후에는 프론트에  들어가 주방에서 나오는 주류와 안주를 웨이터분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클럽에 세개정도의 직업댄서(디스콜 걸)들이 춤을 출수 있는 무대가 있었고 일반인들을 위한 플로어가 있었다. 프론트일이 조금 한가해 지면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 지라 나도 모르게 몸이 들썩였고 테이블보다 높게 있는 댄서들이 가끔 시선(視線)을 둘때가  없으면 나와 눈을 마주치고 같이 춤을 추곤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플로어에서 누가 어떤 춤을 추던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저 내가 즐겁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수 있다면 신나게 추면 되는 것이였다. 클럽일 적응될 무렵 댄서 대기실에 볼일이 있어서 들어 갔는데 다들 거의 팬트 차림으로 고스톱을 치고 있었는데 혈기왕성한 나이이 그걸 보니 몸둘바를 몰라 하는데 한술 더뜬 일은 댄서들이 일반적으로 일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 가는데 특별히 손님들이 원하면 외박를 나가곤 했던 것이였다. 헌데 한 댄서가 사장이 손님을 따라 나가라고 했는데 나가질 않으니 사장이 하는 말이 " 야 니년 XX 는 XX 를 둘렀냐"라는 말을 하는데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머리속에 클럽만 보면 종종 떠오른다. 
         일반 나이트클럽과 달리 식사를 호텔 종업원 식당이 별도로 있어 그 곳에서 식사를 하는데 호텔일을 하시는분들과 종종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팁의 문화가 있는 호텔인지라 종업원 끼리도 서로 주고 받는게 있었다. 물론 나도 손님들에게 팁을 받았으면 팁이 급여보다 더 많았고 나 또한 팁을 사용했는데 바로 이식당에서 배식하는 분들께 토큰(Token-버스표)을 한개를 드리는거였고, 그러면 계란후라이던 모든 한개씩 더 주시는 거였다. 팁에 왜 필요한지 알게 해준 일이였다...Money Talks..

다섯번째는 사업을 접고 한때 Skin Scuba Shop를 함께 운영하는 형님이 옷을 판매하는 대리점을 해서 안양에서 춘천과 제천의 매장을 다니면서 일을 도와준적이 있다.  이 시기에 그 형님이 매일 하시는 챗팅(Chatting)을 나도 시작하게 되는 계기였다.

대학생활중 방학기간을 이용했던 일들은 최소 한달 이상씩은 한것으로 생각나며, 이 모든 경험들이 그 분야에 단어를 습득하게 하였고 다양한 직업군,  그안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상대를 생각하도록 만든 좋은 기회였다.


※ 아르바이트는 단기 혹은 임시 고용되어 일하는 것을 의미(Part-Time), 독일어 'Arbeit'는 "일하다" 혹은 "노동"을 뜻하며, 국내에선 시간일로 바꾸어 졌으며 최근에는 계약직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을 프리터, 미국은 저임금 단순노동을 맥잡(Mac Job)이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