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시간제 노예라는 글귀가 생각이 난다..
조금은 비약같지만 집에 데리고 있는 노예보다는 관리가 그만큼 편리하다는 말같다.
내가 처음으로 나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았던게 아마 매우 어렸을때 같은데 정확한 나이는 생각나지 않지만 남의집(친구집인듯....) 고구마를 캐주고 일당으로 고구마를 받았던거 같다. 더 이전 기억은 양식굴을 생산하기 위하여 굴(石花)껍질에 구멍을 뚫어 줄로 매다는 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도운것이 생각나지만 임금을 위한 노동력 제공은 아니였다.
정식적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게 대학 입학후(?)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하였으며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려 시간순서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다만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나는차례순이다.
그 다음은 폐 냉장고를 부수는 일이였다. 그때 아마 처음으로 냉장고를 보상판매 하는 시작했던 걸로 생각이 되는데 그래서 인지 예상치 않게 많은 냉장고가 폐품으로 나왔으며 핵심부품인 콤프레셔(Compressor)와 내부에 있는 A급 플라스틱(Plastics) 이 두개를 주로 재활용하기 위해서 분리하는 것이였다. 작업이 냉장고 케이스에 나사(Bolt & Nut)로 조여져 있는 컴퓨레셔를 하나하나 해체하는게 아니라 도끼로, 플라스틱 또한 공사현장에서 못을 빼는 크나큰 연장(단어가 생각이 안남...빠루?...)을 사용했다. 난 젊다는 이유하나 만으로도 당연히 도끼질을 했다. 대략 하루에 1만 2000번의 도끼질을 해야만 하루가 갔다. 첫날은 도끼를 쥐었던 손이 잡은 모양 그대로 유지하여 펴지질 않았다. 머리를 감을때도 도끼를 잡은 손모양 그대로 감았다. 정말로 다음날은 하지 못할꺼 같았고 흔히 말하는 노가다(No Shoulder)를 어찌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젊은지라 다음날 나가서 일을 하였고 비오는 날을 빼고 달포를 일했던거 같다. 육체노동도 적응하기 나름이였다. 그렇게 번돈은 내자신을 위해서 한푼도 쓰질 않고 동생 등록금 일부와 나머진 어머니께서 사용하신거 같다.
세번째는 알루미늄샷시와 유리를 아파트에 시공,보수 하는 일이였다. 지금은 너무나 커져버렸지만 송파구 문정동이였다. 그땐 이제 막 그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시기였고 건설사에서 일괄 시공을 하지 않았던 부분이 많았던 것이였다. 그래서인지 일이 참 많았고 형님 고향 친구분이였던 실제 사장님이 성격도 좋고 기술이 좋았다. 난 도우미였다 (데모도...일본식 용어가 태반이라...) 그곳에 배운게 많았다. 하루는 체육대 교수라는 집에 가서 일을 하는데 그집 안주인이 미모를 갖추었는데 정말로 일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것이였다. 작업자들 모두가 고마워서 반나절이면 끝날일을 하루종일 해서 깔끔한 마무리를 해 주었다.같은 비용으로 두배의 효과가 났던 것이다. 또한번은 젊은 신혼부부집에서 일을 했는데 작업자가 갈때까지도 일어 나지 않고 준비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작업은 시작되었고 점심도 간단히 시켜 주면서 반무관심으로 일관하여서 작업이 실제 작업시간보다 반도 안걸렸다. 또 한번은 잠실의 장미 아파트로 기억이 나는데 10층 이상으로 작업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작업자에게서 약간의 발냄새가 났었다. 그러면서 발 딛는 곳마다 신문지를 깔아 놓았다. 지금이야 작업하는 사람들이 모두 준비해서 그런일도 없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심리적으로 작업하는데 위축을 가져와서 일이 대충 끝났고 마무리 하면서 내가 한마디 던진게 "고위층 사셔서 하나님이 가까이 있어서 좋겠네요" 하면서 쓴 웃음을 지은적이 있다. 같은 돈으로 다른 효과를 내는 재미있는 현상이다.
네번째는 홍대앞에 있는 서교호텔 디스코 나이트클럽 이였다. 그곳에서 저녁12시까지는 입구에서 "어서오십시오" 라는 말과 함께 클럽으로 안내를 하는 가이드를 했고 그 이후에는 프론트에 들어가 주방에서 나오는 주류와 안주를 웨이터분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클럽에 세개정도의 직업댄서(디스콜 걸)들이 춤을 출수 있는 무대가 있었고 일반인들을 위한 플로어가 있었다. 프론트일이 조금 한가해 지면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 지라 나도 모르게 몸이 들썩였고 테이블보다 높게 있는 댄서들이 가끔 시선(視線)을 둘때가 없으면 나와 눈을 마주치고 같이 춤을 추곤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플로어에서 누가 어떤 춤을 추던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저 내가 즐겁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수 있다면 신나게 추면 되는 것이였다. 클럽일 적응될 무렵 댄서 대기실에 볼일이 있어서 들어 갔는데 다들 거의 팬트 차림으로 고스톱을 치고 있었는데 혈기왕성한 나이이 그걸 보니 몸둘바를 몰라 하는데 한술 더뜬 일은 댄서들이 일반적으로 일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 가는데 특별히 손님들이 원하면 외박를 나가곤 했던 것이였다. 헌데 한 댄서가 사장이 손님을 따라 나가라고 했는데 나가질 않으니 사장이 하는 말이 " 야 니년 XX 는 XX 를 둘렀냐"라는 말을 하는데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머리속에 클럽만 보면 종종 떠오른다.
일반 나이트클럽과 달리 식사를 호텔 종업원 식당이 별도로 있어 그 곳에서 식사를 하는데 호텔일을 하시는분들과 종종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팁의 문화가 있는 호텔인지라 종업원 끼리도 서로 주고 받는게 있었다. 물론 나도 손님들에게 팁을 받았으면 팁이 급여보다 더 많았고 나 또한 팁을 사용했는데 바로 이식당에서 배식하는 분들께 토큰(Token-버스표)을 한개를 드리는거였고, 그러면 계란후라이던 모든 한개씩 더 주시는 거였다. 팁에 왜 필요한지 알게 해준 일이였다...Money Talks..다섯번째는 사업을 접고 한때 Skin Scuba Shop를 함께 운영하는 형님이 옷을 판매하는 대리점을 해서 안양에서 춘천과 제천의 매장을 다니면서 일을 도와준적이 있다. 이 시기에 그 형님이 매일 하시는 챗팅(Chatting)을 나도 시작하게 되는 계기였다.
대학생활중 방학기간을 이용했던 일들은 최소 한달 이상씩은 한것으로 생각나며, 이 모든 경험들이 그 분야에 단어를 습득하게 하였고 다양한 직업군, 그안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상대를 생각하도록 만든 좋은 기회였다.
※ 아르바이트는 단기 혹은 임시 고용되어 일하는 것을 의미(Part-Time), 독일어 'Arbeit'는 "일하다" 혹은 "노동"을 뜻하며, 국내에선 시간일로 바꾸어 졌으며 최근에는 계약직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을 프리터, 미국은 저임금 단순노동을 맥잡(Mac Job)이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