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14, 2012

아버지..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 가실때 옆에서 지켜만 보고 서 있었다. 응급차를 불러놓고 만감이 교차하면서 울고있는 여동생과 아버지에게 정신좀 차려 보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옆에 서서 숨소리가 점점 약해지시고  혈색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은 빠른 병원처방이 필요하다고 직감했으나 아무것도 못하고 서있기만 했다. 응급요원들이 왔을때 어머니는 이미 때가 늦으셨다고 생각하셨는지 병원으로 가시는걸 만류하시고 집에서 돌아가시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3분뒤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목소리에  응급차를 불러 놓고 집에서 걸어서 어머니집까지 그리고 임종을 보는 순간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건만...

나는 아버지와 그렇게 살갑게 지내지 못했다. 조용한 성격이신 아버지는 그저 아들이 하는대로 두고 보시는 자유방임형 교육 스탈이였다. 젊은날 자신의 길을 정하시지 못하고 내가 생각하는 철학적 신념을 가지시지 못한 아버지였기에 내가 가장 필요할때 아들을 향한 외침이나 어떻한 요구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 나이가 들어 이해 할 수가 있지만 그땐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라는 단어를 붙혔으며 내 인생의 행로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어서 였다.

친가와 연을 끊어버린 아버지의 장지는 미리 정해지지 못하였고 공동묘지나 납골당을 생각하였으나 장지문화를 그리 찬성하는 사람이 아닌 나와 형제들과 어머니, 가족 모두 화장(火葬)으로  바다에 유해(遺骸)를 뿌리는걸로 결정했다. 화장(火葬)을 하는날 우린 모두 아버지가 기계에 생명을 더 연장 할 수도 있었지만 고통으로 인한 해방은 죽음이 더 나았을꺼라며 서로를 애써 위로하며  표정을 밝게 유지 하려고 했다.

10월의 한낮의 날씨는 그리 차갑지는 않았지만 유골함의 따뜻한 기운과 아버지라는 생각때문인지 오랫동안 손을 떼지 못하도록 했다. 장례로 인한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 오후에 되어서 다음날 뿌리기로 한 유해(遺骸)를 어머니께서 밤에 하고자 하셔서 가족모두 각자의 차를 타고 가까운 바닷가로 갔다. 난 무의식적으로 바닷물을 만져 보았고 밤바다의 차가움에 적지 않게 놀랬으나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유해(遺骸)를 뿌렸다..

나에겐 그 차가운 바닷물에 아버지의 유해를 보낸다는게 마치 내가 그곳으로  뛰어드는  심정이였다. 돌아 오는 길 내내 차가운 바다와 그곳에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착찹하고 내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아버지 살아생전 무심했던 내가 돌아가셔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데...

평소 여러가지 잡다한 물건들에 관심도 많으시고 모으길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형제들이 어머니집 모이는 날,형제들이 이것저것 정리할때 난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대부분 버릴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별도의 각대봉투에 몇장의 나의 졸업사진과 졸업과 함께 첫 직장의 합격통지서를 발견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잘나지 못한 당신자식이 사회에 첫발을 당당하게 딛는 모습을  간직하셨다고 생각하니 울컥했다. 아버지..  난 내 자신이 스스로 지나간일에는 후회를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한 많은 부분을 그렇게 해왔고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